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술탄 마흐무드 (문단 편집) === vs 카라한/구르족 === 아프가니스탄 중부 산악 지대 (구리스탄)의 서부에 위치한 불교 왕국인 구르 왕조 정복. 사부크티긴 시절 그에 복속하고 조공했던 무함마드 이븐 수리. 마흐무드가 인도 원정에 집중한 틈에 조공 안하고 그의 동맹들을 위협하였다. 가즈니 조의 총독이 원정해 오면 접근이 힘든 고산지대로 도피, 게릴리전 1011년 초, 마흐무드의 친정. 구르 군대는 선발대를 이끈 헤라트 총독 알 툰타쉬를 패배시켰으나 곧 마흐무드의 본대와 마주하자 퇴각하였다. 이후 이븐 수리가 1만의 군대와 산악 요새에 틀어박혔다. 마흐무드는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꾀를 내어 거짓으로 후퇴하는척 하였다. 이에 이븐 수리가 추격해 왔고, 마흐무드는 평지에 다다르자 마자 말머리를 돌려 반격하였다. 구르 군대는 대패하였고 이븐 수리를 포함한 지도부가 포로로 잡혔다. 마흐무드는 이븐 수리의 아들 아부 알리를 구르 왕조의 군주로 임명한 후 회군하였는데, 도중에 이븐 수리는 반지 밑에 숨겨두었던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비슷한 시기 발루치스탄 북부 쿠스타르의 통치자가 카라한 칸국의 꾀임에 넘어가 조공을 중단하였다. 이에 1011년 12월, 마흐무드가 친정하여 쿠스다르를 포위하였다. 이에 쿠스다르의 통치자는 재차 복속을 청하였고, 마흐무드는 1500만 디르함의 배상금과 15마리의 코끼리를 받는 대가로 그를 수락하였다. 마흐무드는 막대한 재산과 함께 가즈니로 귀환하였다. 1015년에는 구리스탄 서부 (카와빈) 정복 1017년 거란이 대 카라한 동맹 제의 제국의 수도인 가즈니와 인접한 산악지대에 살던 아프간 족은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1019년, 카나우지에서 회군하던 가즈니 원정군은 고갯길에서 아프간 족의 습격을 받았다. 분노한 마흐무드는 그들을 일망타진 하기로 하였다. 그해 말엽, 마흐무드는 다른 지역으로 향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후 그들의 소굴로 들이닥쳤고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족민을 처형하였다. 피의 복수를 자행한 후에야 마흐무드는 가즈니로 돌아왔다. 1020년 헤라트 총독인 아들 마수드가 가장 험준하기로 악명 높은 구리스탄 서북부 (타브) 정복. 구리스탄 평정 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부 누레스탄 지방의 사람들이 사자를 섬긴다는 소식이 귀에 들리자 마흐무드는 그곳에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1020년 5월) 그는 석공과 목공들을 소집하여 해발 6000m 가 넘는 고봉들 사이로 길을 내어 진군하였다. 그곳은 키라트, 누르 라는 두개의 계곡 지대였는데 전자의 지배자는 저항 없이 항복,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마흐무드에 복속하는 조건으로 통치를 이어나간 것에 비해 후자는 저항하였다. 마흐무드는 시종장 알리 이븐 아르슬란 알 카립을 파견하였고 그는 누르 계곡을 정복한 후 수비대를 남겨놓았다. 마흐무드는 새로 정복된 누레스탄 일대에 교사들을 파견하여 일대를 이슬람화시킨 후에야 가즈나로 돌아왔다. 한편 아흐마드와 나스르 형제 간의 동서 대립은 둘이 각각 1017년, 1013년에 사망한 후 그들의 장남인 유수프 카디르와 만수르 아르슬란이 물려받았다. 1016년 대카간임을 자처한 만수르는 동카라한을 공격하였고 그틈에 마흐무드는 화레즘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자 1020년, 만수르는 유수프 카디르와 타협하고 함께 동맹하여 호라산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마흐무드는 어렵지 않게 카라한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동서 화합은 두동강이 났다. 1021년 동카라한-셀주크 연합군이 서카라한의 부하라를 함락하며 전세가 역전되자 1025년 만수르는 대카간 주장을 철회하고 은퇴하여 수피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가즈니 제국의 북쪽 국경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